고1 때 국어 담당 선생님이 있었다. 1학년 때의 수업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2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나눠주는 스터디플래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공짜로 나눠주는 플래너고, 매주 관리도 해준다는 말에 쓰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그 국어 선생님이 담당이셨다.
사실 스터디플래너라기엔 일종의 워크북이었다. 쉬는 시간 동안 그 전 시간의 내용을 복습하게끔 세 줄 정도 분량으로 메모하는 것, 그리고 플래너 맨 마지막 열 장 쯤은 담당 선생님과 서로 필담을 나눌 수 있도록 구성된 쪽지용 페이지가 있었다. 그 선생님과는 수업을 들었던 1학년 때보다 그 플래너를 쓰며 매주 필담을 나누며 더 가까워졌다.
거기엔 다른 플래너들이 대게 그렇듯 꿈이나 목표를 쓰는 란도 있었는데 나는 그 항목을 쓰는 게 진로설계 과목 숙제에 있는 똑같은 질문에 답하는 것보다 더 고민을 많이 했다.
교무실 끄트머리에 있던 그분의 상담실에서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매주 플래너를 제출하고, 돌려받고, 플래너를 함께 쓰던 친구와 과제때문에 싸우고 절교하고는 선생님과 상담으로 화를 풀고 화해하고, 교내외 운문 글짓기 대회에서 상품으로 받아 모아둔 문화상품권들이 싸그리 동생의 메이플스토리 계정에 털려버린 걸 알게되었을 때도 플래너에 쓰곤 선생님께 위로받았다. 언니의 폭로로 내가 그간 갖고 있던 소설과 만화책들을 분서갱유당했을 때에도 선생님은 몇 시간이고 내 말을 들어주셨다.
말주변 없는 나는 두서없이 꺼내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았다. 친구와 유야무야 화해하고 대충 덮힌 상처 위에 다시 우정을 쌓아도, 동생의 충동적인 행동에 다른 가족들은 어려서 그랬다며 누나가 이해해 달라며 없던 일이 되어도 그분만은 내 말을 경청했고 상담실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
선생님은 언젠가 전근을 가셨고, 나는 스터디 플래너 쓰는 것을 그만뒀다. 졸업하고 난 뒤에는 찾아갈 이유가 없다고 느껴 학교를 여지껏 다시 들러본 적이 없다.
아직도 서랍엔 그 때 썼던 플래너 두 권이 있다. 그 안엔 5*3 정도 자그마한 매 시간 복습 칸에 5줄 이상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복습 혹은 과목 선생님들의 얼굴 그림과 말투를 재현한 농담들, 그리고 칸이 차고 넘칠 정도로 그분과 주고받은 필담로 가득하다.
나의 영지 선생님,
존재만으로도 쉬는 시간 잠을 줄여주었던 플래너와 그분이 생각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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